2017
백범김구기념관·효창공원
겨레의 큰 스승과 독립의사들의 자취
우리나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박물관과 전시관들이 존재한다. 국보나 보물 그리고 지역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국립이나 시립박물관은 물론이고 하나의 주제로 조성된 개인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박물관을 찾아가본다. 이번호는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이다. 임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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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의 소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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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현대사 역사박물관

백범김구기념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21022일 개관했다.

백범김구기념관에 들어오면 중앙홀에 백범의 좌상이 있다. 덧붙이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은 이 공간에서 백범은 그의 상징이기도 한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입은 굳게 다문 채 찾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 백범 뒤에 걸려 있는 태극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중앙홀 왼편으로 돌아서면 전시관 입구가 보이는데, 백범의 나의 소원중 일부가 적혀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하는 백범의 나의 소원을 지나면 그의 일대기와 역사적 사건을 정리한 상징홀-연보가 이어진다. 백범은 크게 5가지 활동을 펼쳤다. 교육활동, 독립운동, 의영투쟁, 군사활동, 통일운동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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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활동에 대해 백범은 나의 소원중에서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국민교육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된다고 밝히고 있다.

18963월 치하포의거로 김구는 인천감리서로 이감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김구는 감옥생활 중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애국정신을 일깨웠고, 자신은 신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정치의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김구가 탈옥 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해 백범은 나의 소원중에서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김구는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안둥을 거쳐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있었다. 독립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으나 임시정부는 선생의 국내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경무국장으로 임명했다. 4년여동안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를 보호하고 일제 밀정을 찾아내 설득하거나 처단하면서 임시정부를 수호했다. 1923년 임시정부 내무총장, 1926년 국무령에 선출됐다. 국무령에 선출된 김구는 임시정부 개편에 착수해 1927년 국무령제를 국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면서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힘썼다. 또한 임시정부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주지역의 동포들에게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쓰기 사업을 펴나갔다. 독립운동 자금이 들어오면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함으로써 임시정부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는 김구의 현상금을 2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렸는데, 이때 일제가 내놓은 현상금 60만원은 2002년 기준으로 198억원의 가치에 달한다.

 

의열투쟁에 대해 백범은 도왜실기 중에서 한국인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세상에 호소하여 정당한 공론을 구하려 함과 아울러 우리는 이른바 폭행을 찬양하는 자가 아니며, 혁명의 사선을 넘나든 우리에게는 이 길이 최소의 역량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이라는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군사활동에 대해 백범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이로부터 험한 산과 깊은 물에도 뛰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창을 베고 밤을 새우는 삼한건아와 화북일대에 산재한 우리 백의대군과 또 국내의 삼천만 혁명 대중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왜적의 철제를 단호히 쳐부수고 성스럽고 깨끗한 천직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김구는 19409월 충칭의 자링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중국대륙 각처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을 비롯, 19438월 인도 미얀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해 19457월까지 2년여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미국의 잔략첩보기구인 OSS와는 독수리작전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에 합의하고 OSS 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도노반 소장과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국내 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합의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통일운동에 대해 백범은 평양도착성명서 남북동포에게 고함’(1948.4.21.)에서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재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구는 카이로에서 전후 문제를 협의하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19437월 조소앙, 김규식 등과 장제스를 면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완전독립을 관철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장제스는 카이로회의에서 미국, 영국을 설득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에 적당한 시기라는 단서가 붙었다. 김구는 이에 반대하며,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완전한 자주독립 이외에는 어떠한 방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자주독립에 대한 일관된 의지는 해방 후 반탁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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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서거와 추모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으나 미국은 미군정을 확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친일세력과 민주주의 세력,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권력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되지만 김구는 지속적으로 통일민족국가의 수립과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다 1949626일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했다.

서거후 40여년 만에 이뤄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뇌부에서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차원의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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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이 직접 쓴 자서전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후 1928년부터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범일지 상권은 고국에 있는 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형식으로 집안의 내력과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중심으로 쓴 글이고, 하권은 그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의열투쟁, 즉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중국 내륙으로의 피신생활과 해방되기까지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독립운동역사 담고 있는 효창공원

효창공원은 원래 효창원이었다. 효창원은 1786년 다섯 살에 요절한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1782~1786)의 묘를 이곳에 모시면서 시작됐다. 그 후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와 그의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가 함께 모셔지며 조선왕실의 가족묘원이 됐다. 그러나 효창원은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효창원은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효창공원으로 변경됐지만 단순한 위락시설로 남지는 않았다.

1946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주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마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를 일본에서 모시고 와 옛 문효세자 묘터에 안장했다. 이어 19489월에는 중국에 있던 이동녕, 차리석의 유해, 10월에는 조성환 선생, 19497월 백범 김구 선생이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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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의 묘안중근 의사 빈묘

조국 광복을 위해 몸바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모신 묘역이다. 1946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봉환하고 안장됐다. 삼의사의 묘 왼편에는 19103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려고 마련한 빈 무덤이 있다. 삼의사 묘역 기단석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직접 쓴 유방백세’(아름다운 이름을 백세대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겠다)라는 4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봉창 의사(1901~1932)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일본 국왕 폭살계획을 세워, 19321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져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으나,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를 통해 그와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윤봉길 의사(1908~1932)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4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겸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 기념식에 참가한 시라카와 대장 이하 일본요인들을 폭살, 중상시키고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1219일 순국했다.

전시장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시계와 윤봉길 의사의 시계가 전시돼 있는데, 그 일화가 전해진다. 백범일지에서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김구 선생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교환했다고 밝히고 있다.

 

백정기 의사(1896~1934)3·1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해 노동자운동과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하였고, 일본 시설물 파괴공장과 요인사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상하이 훙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65일 지병으로 순국했다.

 

애국선열의 영정모신 사당 의열사

의열사는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선생의 삼의사 등 7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413일부터 합동추모제전을 봉행해 오고 있다.

 

월간 프린팅 코리아 2017년 3월호 통권 177호    

 
 

  프린팅코리아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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