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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래 전부터 불씨를 얻는 방법으로 단단한 나무끼리의 마찰 또는 돌끼리 맞부딪치게 하여 불을 일으켜서 사용하여 왔다. 성냥을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는다. 1669년에 낮은 온도에서 타는 인이 발견되어 근대적인 성냥을 만드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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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에는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 유황과 인을 섞어서 나뭇가지에 바른 일종의 성냥을 만들었으나, 불이 너무 잘 붙어서 위험스러워 실용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 간편한 발화법이 계속 연구되어 19세기 초 성냥의 원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이전 만해도 부싯돌이나 쇠 조각을 서로 마주치게 하여 주로 마른 쑥으로 만든 부싯깃에다 불을 붙여 써오다가 「성냥」이라는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발화도구가 출현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고마운 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됨에 따라 발화도구인 성냥을 개비(軸)로 보관하는 성냥갑(case)이 자연스럽게 필요하게 되었다. 필요 불가한 조건으로 생겨난 package의 일종인 성냥갑은 사용장소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요즘에야 광고 판촉용으로 나누어주는 개비 성냥갑이 다양한 디자인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대부분 일회용 라이타로 대체 되어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성냥이 제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23년 일본인이 발간한 ‘인천부사’에는 1885년 서울 양화진에 일본인과 외국인이 합작하여 최초의 공장이 설립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한반도에 대한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연구 발행된 ‘조선에 관한 기록’은 1886년에 외국인이 제물포(인천)에 최초의 공장을 설립했다고 적고 있다.

1917년에는 인천에서 만들어진 성냥이 중국까지 수출되었으며,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호황을 누리던 인천의 성냥공장들도 일본인들이 생산한 값싼 성냥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다. 한때는 인천의 성냥공장을 주제로 한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하면서 군인들이나 민간인들이 애창하던 응원가 속에서 인천의 성냥공장들의 흥망성세를 짐작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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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국내에는 성냥의 제조시설이나 규모에 있어서 제법 유명 브랜드를 가진 비사표, 아리랑, UN등 기업의 규모를 갖춘 큰 성냥공장들도 있었지만 성냥공장이라고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최소의 자본으로 변두리 빈 창고의 일부 몇 평 안 되는 판자집에서 가내 수공업 형태를 제조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숙련되지 않은 직공의 손으로 원시적인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성냥개비들은 갑이 없이 시장에서 되로 소복히 담아 팔기도 하였다.

한때는 우표수집과 같이 모던한 디자인과 특이한 지기구조와 형태로 인하여 다양하게 개발된 광고 판촉용 성냥갑을 모으는 애호가들도 많았다.

판촉용 성냥갑은 개업을 알리는 다방이나 카페, 여관, 식당이 주류를 이루었고 신제품을 알리는 다양한 업체들도 가세하여 그 수요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 애연가들은 지퍼 라이터나 특이한 형태의 라이터를 가지고 다녔으나 일부 감각 있는 애연가들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개발된 판촉용 성냥갑을 멋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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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대부분의 성냥갑들은 광고 판촉용으로 제작된 세련된 표면 디자인과 형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판용으로 판매되는 가정용 덕용 포장으로 직사각형 서랍식 및 뚜껑식 사각형과 팔각통 형태. 포켓용 납작 성냥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통성냥의 경우 750개에서 800개비가 들어 있고 서랍식의 경우 500개비가 갑속에 들어있다. 이러한 성냥갑의 표면 디자인은 한결같이 황색바탕에 적색과 흑색으로 그려진 획일적인 것들이었다.
또한 재질은 덕용 포장의 경우 두꺼운 판지에 80g 모조지에 오프셋인쇄를 하여 싸 바르는 식으로 덧발랐으며 포켓용의 경우 약 70개들이 갑으로 얇게 켠 나무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다 쓰고 발로 밟으면 「아삭」하는 마치 비스켓과자 씹는 소리를 내며 납작해졌다.

할 일없는 사람들은 다방의 구석진곳에서 성냥개비를 이용하여 탑을 쌓을 후 부서지는 소위 공든탑을 만들며 세우고 부수며 소일하는 실업자들의 모습도 그때의 가난했던 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그 당시 만해도 전력난이 심각해 우리의 가정에서는 양초와 성냥은 필수품목이었으며 부엌살림에 있어서나 여러 가지 용도에서도 성냥은 소중한 도구였다.

요즈음에는 집들이 선물용으로 휴지나 세제 목욕용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성냥이나 양초를 사 가지고 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새집으로 이사가면 운수(運數)가 불길과 같이 대길(大吉)하라고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불장난을 하다 성냥갑을 통째로 태워 버려 위험한 지경에까지 도달한 적이 간혹 있어 어른들이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을 싼다고 경고하던 기억이 있다. 이젠 이러한 성냥갑도 문명의 이기에 몰려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있다.
<최충식 교수의 ‘옛포장의 기억속으로’중에서>

   

<월간 프린팅코리아 2003년 9월호 통권 14호>